[교황의 트윗]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정복당하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놓읍시다”


교회가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를 기념하는 7월 31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트위터 계정인 “@Pontifex”에 다음과 같은 트윗을 보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정복당하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놓읍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도로, 이웃을 위한 봉사에 동참합시다.”

권력자들을 위한 전사에서 하느님을 위한 전사로!

기사도(騎士道) 교육에 기반한 성 이냐시오의 삶은 이와 같이 요약된다. 이니고 로페스 데 로욜라(Íñigo López de Loyola)는 지난 1491년 스페인의 명문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아가 된 후, 가톨릭 군주 페르디난도 국왕의 왕실 재무상에게 보내져 기사도와 종교 교육을 받았다. 그 시절 이냐시오는 문학과 시에 심취했으며, 또한 그 당시의 기사(騎士)들처럼 오락에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불같은 성격을 가진 이 젊은 기사는 프랑스에 의해서 점령당한 팜플로나(Pamplona)를 지키기 위해서 전투에 참가했다가 오른쪽 다리에 고통스러운 수술을 해야 할 만큼의 중상을 입었다.  

그 여파로 그는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했다. 힘겨운 회복기에 그는 카르투시오 회원이 쓴 『그리스도의 생애』(la Vita Christi)와 자코보 데 보라진느가 지은 『성인열전』(il Flos sanctorum)을 읽었다. 그로 인해 그는 몬세라트 (Montserrat)에서 기사의 갑옷을 벗어 던지고, 가난한 자의 옷을 입는 선택을 실행했다. 그리스도의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회개는 카르도넬 (Cardoner) 강가에서의 “큰 깨달음” 이후 더욱 강렬해졌다. 그는 마침내 예루살렘과 성지들을 순례하기에 이른다. 그는 성지 순례를 마친 후 스페인으로 돌아왔으며, 다음엔 파리대학에서 7년 동안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1534년 8월 15일 파리의 몽마르뜨(Monmartre)에서 다른 6명의 동료와 함께 청빈과 순결 서원을 했다. 그들의 바람은 예루살렘 혹은 교황이 파견하는 또 다른 장소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제서품을 받은 후, 예수회(Compagnia di Gesù) 설립의 승인을 위한 작업에 착수 했다. 바오로 3세 교황 때부터 시작한 이 노력은 마침내 1550년 율리오 3세 교황에 의해 승인됐다. 이냐시오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됐으며, 자신의 동료들을 세상에 파견했다. 파견된 동료들은 학교와 신학교들을 세우고, 설교와 고해성사를 비롯한 교육 사업을 통해 모든 사회 계층에 다가갔다. 그는 1556년 65세의 나이로 선종했으며, 1622년에 시성됐다.

1548년 처음으로 출간된 『영신수련』(Gli Esercizi spirituali)은 성 이냐시오의 값진 유산 중 하나다. 이 책의 핵심은 식별에 관한 것이다. 지난 2013년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와의 인터뷰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식별은 성 이냐시오가 내적으로 가장 많이 작업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식별은 주님을 더 잘 알고, 주님을 더욱더 가까이 따라 갈 수 있게 하는 투쟁의 도구였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예수회 출신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 나라의 위대한 지평선 안에서의 사소한 일상들을 실행하는 아량의 미덕에 초점을 맞추고, “식별은 시간이 걸린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항상 “식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식별은 “당신이 나중에 하려던 것을” 즉시 할 수 있도록 촉구하며, “갑작스럽게 결정한 것들을 의심하게 한다”고 교황은 덧붙였다. “저는 항상 처음의 결정을, 다시 말해 제가 무엇인가를 결정해야하는 경우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의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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